본문 범위  창세기 16장 1절-16절 (중심 구절 13절)

오늘은 창세기 16장을 통째로 훑는 대신 한 구절 앞에 오래 서 있어 보려고 합니다. 하갈이 광야 샘 곁에서 하나님을 부른 이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그 한마디입니다. 이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앞뒤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감찰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차례로 짚고 마지막에 지금 이 구절을 어떻게 읽을지까지 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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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 하갈과 이스마엘 |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

오늘은 열세 절 한 줄 앞에 서 봅니다

광야 한가운데 작은 샘이 고여 있는 수채화 삽화

창세기 16장은 짧습니다. 열여섯 절이면 끝나요. 그 안에 도망과 만남과 이름 짓기가 다 들어 있는데, 오늘은 그중 한 줄만 붙듭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 문장이 유별난 데가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사람의 이름을 바꿔 주시는 장면이 여럿 나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사래가 사라가 되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방향이 반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부를 이름을 짓습니다.

그 이름을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도 함께 봐야 합니다. 족장도 제사장도 아닙니다. 애굽 사람이고 여종이고, 그때는 도망 중이었습니다. 본문은 그를 여러 번 사래의 여종 하갈이라고 부릅니다. 이름 뒤에 신분이 늘 붙어 다녀요. 그 사람 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 나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부를 이름을 지은 그 자리에 서 있던 이는 도망 중이던 여종이었습니다.

그 샘까지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 하면요

메마른 들판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이어지는 흙길을 그린 수채화 삽화

시작은 아이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가나안에 들어온 지 십 년이 지나 있었습니다. 사래가 먼저 말을 꺼냅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들었다고만 적혀 있어요. 반대도 동의도 없이 그냥 들었습니다.

그다음은 빠르게 어긋납니다. 하갈이 잉태하자 여주인을 멸시했고, 사래는 그 욕을 아브람에게 돌립니다. 아브람은 손을 뗍니다.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대로 그에게 행하라. 세 사람 중 누구도 잘한 쪽이 없는 대목입니다. 본문은 그걸 감추지 않아요.

사래가 학대하자 하갈은 도망합니다. 그가 앉은 곳은 광야의 샘 곁, 술 길 샘물 곁이었습니다. 술로 가는 길은 애굽 쪽으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아무 데로나 달아난 게 아니라 자기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어요. 배가 부른 몸으로 물이 있는 자리에 앉아서.

거기서 그는 물음을 받습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앞부분에는 대답합니다.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한다고요. 뒷부분, 어디로 가느냐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갈 데가 정해져 있지 않았던 거지요.

어디서 왔느냐에는 답했고, 어디로 가느냐에는 답하지 못했습니다.

감찰하신다는 말과 들으셨다는 말이 붙어 있어요

샘물 위로 빛이 내려앉아 수면이 환하게 빛나는 수채화 삽화

열세 절의 감찰한다는 말은 어렵게 들리지만 뜻은 단순합니다. 본다는 말입니다. 스치듯 지나가며 보는 쪽이 아니라 눈을 두고 지켜본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하갈이 이어서 하는 말도 그렇습니다.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보시는 분을 내가 보았다는 겁니다. 시선이 오간 자리예요.

그 앞에는 다른 감각이 하나 더 나옵니다.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하시면서 이유를 붙이시지요.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이름 자체가 들으신다는 뜻을 품고 있어서, 아이를 부를 때마다 그날 들으셨다는 사실이 함께 따라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 장면에는 보심과 들으심이 나란히 놓입니다. 그런데 하갈이 무슨 기도를 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부르짖었다는 기록도 없어요. 말로 내놓지 않은 고통을 들으셨다고 적혀 있을 뿐입니다.

이름이 하나 더 남습니다.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다고요. 위치는 가데스와 베렛 사이라고만 짚어 둡니다. 그 뒤로 사람들은 이 샘을 지날 때마다 그 이름을 부르게 되었을 겁니다. 도망치던 여종 하나가 앉아 있던 자리가 그렇게 불렸어요.

부르짖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말로 내놓지 않은 고통을 들으셨다고만 적혀 있어요.

그런데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떨기나무 한 그루가 선 마른 들판 너머로 옅은 물빛이 비치는 수채화 삽화

이 장면에서 걸리는 대목이 있습니다. 만나 주신 다음에 하신 말씀이 돌아가라는 것이었어요.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학대를 피해 나온 사람에게 그 자리로 돌아가라 하십니다. 상황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가 달라졌습니다. 돌아가는 길에는 자손과 아들과 이름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가 돌아간 곳은 같은 장막이었지만 같은 상태로 돌아가지는 않았어요. 본문은 그 차이만 남겨 둡니다. 사래가 뉘우쳤다는 말도, 아브람이 사과했다는 말도 끝까지 나오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여러 해 뒤에 하갈은 다시 광야에 있게 됩니다. 물이 떨어지고 아이를 떨기나무 아래 두고 살 한 바탕쯤 떨어져 앉아 방성대곡할 때, 같은 말이 다시 나옵니다.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처음 샘 곁에서 들으셨던 분이 두 번째 광야에서도 들으십니다.

그때 하신 일이 눈을 밝히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없던 샘을 새로 내셨다고 하지 않고 눈을 밝히셨다고 합니다. 물은 거기 있었어요. 첫 번째 광야에서도 그는 이미 샘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없던 샘을 새로 파 주셨다고 하지 않습니다.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았다고 합니다.

묵상 포인트

  1. 첫째, 하갈은 어디로 가느냐는 물음에 답하지 못했습니다. 갈 곳을 정해 두고 나온 게 아니었으니까요. 목적지를 말할 수 없는 상태로 앉아 있는 것도 본문 안에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만나 주셨다는 것이 이 장의 이야기예요.
  2. 둘째, 이 장에서 그를 부르는 호칭은 끝까지 사래의 여종 하갈입니다. 신분이 지워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호칭 뒤에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하갈아, 하고 부르시지요. 신분과 이름을 같이 불러 주신 셈입니다.
  3. 셋째, 돌아가라는 말은 상황을 바꿔 주는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들고 돌아간 것은 자리의 변화가 아니라 보셨고 들으셨다는 사실 하나였습니다. 그것만 쥐고 같은 장막으로 돌아간 사람이 이 장의 끝에 서 있습니다.

브엘라해로이가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지금 짚기 어렵습니다. 가데스와 베렛 사이라고만 적혀 있어요. 이름은 남았고 위치는 흐려졌습니다. 그래도 이 장이 오래 읽히는 이유는 샘의 자리 때문은 아닐 겁니다. 아무도 찾지 않던 사람이 앉아 있던 곳에서 이름이 하나 지어졌고, 그 이름이 여전히 불린다는 것 때문이겠지요.